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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기후위기가 부른 불편한 감정도 치유 필요한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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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햇볕에 어지러웠다. 태양이 이마를 찌르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렸고, 아랍인은 모래 위에 쓰러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네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지난 7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사단법인 ‘별의친구들’에서 만난 김현수(59)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이 장면을 언급했다. “주인공 뫼르소가 ‘해가 뜨거워서 사람을 죽인’ 행위를 당시에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해석했죠. 그런데 요즘에는 실제로 ‘햇볕’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어요. (기후변화로 심해지는) 폭염이 우리가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게 할 수도,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집단 트라우마·심리 치료의 권위자로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신샘이(울산 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과장), 이용석(이용석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등 동료 교수들과 함께 ‘기후 상처’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기후가 주는 상처를 보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행동을 하자는 취지”로 만든 책이라 했다.

‘기후 상처’는 폭염, 산불 등 기후위기 영향으로 인간이 겪는 정신적·심리적 고통을 의미한다. 기후위기로 ‘상처’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국내에도 증가하고 있으며, 임상 현장에서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최근 공황장애 환자들의 경우 ‘폭염기에 이렇게 사느니 정말 죽고 싶다’, ‘공기가 뜨거워지니까 호흡을 못 하겠고, 호흡을 못 하겠으니까 죽고 싶어진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극단적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해요. 그밖에도 봄에는 미세먼지, 여름에는 산불이나 폭염 때문에 ‘우울하다’ ‘죽고 싶다’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죠.”

8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광화문점 배움홀에서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 발족식이 열렸다. 김현수(첫째 줄 왼쪽 두번째)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와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 준비모임 관계자 등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 준비모임 제공
8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광화문점 배움홀에서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 발족식이 열렸다. 김현수(첫째 줄 왼쪽 두번째)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와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 준비모임 관계자 등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 준비모임 제공

기후 상처를 가리키는 말에는 기후불안, 생태불안, 기후 우울 등이 있으나 이들이 “독립적인 질환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다만 김 교수는 “기후 등의 문제로 사람들이 어떤 증상을 느끼는 것은 맞다”고 말했다. 기후불안은 기상이변, 해수면 상승 등 기후변화 문제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고, 조금 더 넓은 범주인 생태불안은 삼림 벌채, 오염 등 환경과 그 파괴에 대한 우려로 발생하는 불안을 의미한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기후 상처를 겪는 걸까? 김 교수는 크게 3가지 분류로 나눠서 설명한다. △기존에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인데 상태가 악화하는 경우 △기후재난을 겪은 뒤 외상후스트레스를 경험하는 경우 △청소년·청년이 생태불안이나 외상전스트레스를 겪는 경우 등이다.

“미세먼지나 폭염·산불 등으로 불안·우울 호소하는 이들 늘어 이런 감정을 ‘상처’로 인지해야 치유 위한 행동에 나설 수 있어” 정신과 의사 10여명과 지난 8일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 발족

생태불안의 경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험뿐 아니라 산불 등 실제 기후재난을 겪은 사람들한테도 나타난다. 이런 ‘기후재난 트라우마’는 복합적인데, “산불에 대한 불안, 호흡에 대한 불안, 가진 걸 다 잃은 데 대해 스스로 무능하다 느끼고 우울해진다는 감정 등을 호소한다”고 했다. 특히 이는 인재로 벌어진 화재 등과 달리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강도가 제각각이다. 김 교수는 “상담 과정에서 ‘운명’과 ‘신’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하는 등 신을 원망하거나 허무함을 느끼는 모습도 보인다”고 설명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영향을 놓치면, 취약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김 교수는 “경기 고양에 혼자 살던 70대 치매 노인이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옷을 너무 많이 껴입은 나머지 열사병으로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여름이 되면 치매 노인에게는 온도 조절과 관련한 돌봄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후위기 영향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기후위기 취약계층에 대한 정부 지원 예산은 올해 7207억원으로 전년 대비 21%나 감소(국회예산정책처)한 상태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 정용일 선임기자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 정용일 선임기자

기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 등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정부가 기후변화 관련 데이터를 모으고, 기후변화로 산업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 농·어업 종사자에게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조처를 취해야 하는데, “현재 정부가 그런 논의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저서에서는 개인이 기후 상처를 다루고 해결하는 방법도 이야기했다. “기후위기로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본인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하며, “주변 사람들과 기후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생각 나눔’이 일상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김 교수는 기후변화로 촉발된 불편한 감정들이 ‘상처’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상처가 나면 치료하잖아요? 저자들이 고안해낸 ‘기후 상처’라는 말에는 기후가 주는 상처를 보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행동을 하자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기후 상처에 대한 논의와 행동이 더 활발히 이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 함께 최근 ‘기후 정신건강 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난 8일 출범식도 열었다. 김 교수는 “정신과 의사 10여명을 시작으로 심리상담사와 사회복지사 등 참여 인원을 다양하게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회는 폭염시 대처해야 할 정신건강상의 대책, 어린이·청소년의 기후불안·기후걱정을 돕는 방법 등의 내용이 담긴 책을 출간하고 캠페인도 진행할 계획이다. 의사들이 기후위기를 인지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관련 교육과정도 만들 예정이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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